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수정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수정이가 골라온 책들은 오늘도 <눈의 여왕>이나 <플란다스의 개>, <어린 왕자> 같이 언젠가 가 볼 수 있을 것 같은 먼 나라의 이야기들이었다. 이야기의 굴곡에 따라 울고 웃던 수정이가 어느 새 잠이 들면 나는 이불을 꼭 덮어주고 조용히 방문을 닫으며 눈물을 훔쳤다.
수정이가 학교에 가지 못한 지도 어느 새 일 년이 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기 시작했으니, 또래 친구들도 없었다. 대신 아파줄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몇 차례나 수술을 반복해도 수정이의 몸 상태는 쉽게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수정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갖고 싶은 것이든, 먹고 싶은 것이든 무리를 해서라도 다 사 주었다. 하지만 수정이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바깥을 돌아다녀 본 적이 없으니 점점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수정이는 시들어가는 꽃처럼, 멍한 얼굴로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다 나아서 학교에도 가게 되고, 친구들도 사귀게 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도 항상 묵묵부답이던 수정이가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동화책을 읽어주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눈의 여왕이 사는 얼음 궁전과 파트라슈가 뛰어 놀던 튤립이 만발한 들판, 어린 왕자가 도착했던 사막과 같은 곳에 가 보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래 동화책을 읽어 줄 걸 그랬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남편과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몇 주 뒤 수정이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큰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남편과 나는 지쳐 있는 수정이를 위해 나들이를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너무 먼 곳으로 갈 수도 없어서 고민 끝에 결정한 행선지는 대부도였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바다를 좋아할뿐더러, 대부도가 요 근래 관광 개발에 힘을 쏟고 있어 여러 가지 볼거리가 많이 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수정이는 나들이를 가기로 한 날 아침에도 식사를 몽땅 토했지만, 좀 더 나으면 가자는 남편의 말에 주사를 맞을 때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남편과 번갈아 가며 달래도 보고 혼내도 보고 한참 애를 썼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눈이 퉁퉁 부은 아이를 안아서 차에 태우고 대부도로 향했다.
바다에 들어가기도 이른 계절이라 가서 아무것도 못 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마침 대부도에서는 튤립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섬에 웬 튤립이 있나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우리 가족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알록달록한 튤립을 지천으로 심고 풍차까지 세워 섬을 네덜란드의 전원 풍경처럼 꾸며 두었던 것이다. 조성된 지 얼마 안 된 테마파크인 모양이었다. 바닷바람에 오색 풍차와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 멀리 바다가 건너다보이는 넓은 갈대밭까지 발견한 수정이가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엄마, 이것 좀 봐요! 꼭 동화책 속에 들어온 것 같아!”
차로 이십 여 분 거리에는 유리섬이 있다고 했다. 유리섬. 유리로 만든 섬. 그 이름을 듣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수정이는 잠깐만 해변을 걷겠다며 미처 말리기도 전에 차를 뛰쳐나갔다.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딸아이가 마치 유리로 만든 성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남편과 나는 수정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꼭 잡고 있었다.